히노토 편 cm by. 이드님

더보기

문득 바람이 그 애의 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 애가 손을 들어 엉킨 것을 정리하니 너는 그 손을 잡았다. 그 애가 고개를 들곤 너를 보며 웃었다.
그 애는 항상 너를 보면 웃었다. 항상 웃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쩔 땐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을 했고, 또 다른 때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조금 토라져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을 때도 있었고, 아주 가끔은 괴로운 얼굴을 했다.
아무튼 그 애는 대부분 너를 보면 웃고 있었다. 수많은 표정을 지었지만, 역시 웃을 때가 가장 많았다.
그러면 너도 그 애를 따라 웃었다. 귓가가 발갛게 물들고,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마주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두 사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너와 그 애를 보면 바로 ‘두 사람은 사랑하고 있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항상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 애와 너를 지켜보며 괴로워했다. 상처받을 것을 알고 있는데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떼지 못한 쪽이 더 맞겠다.
-
너와 나는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다. 구요에는 수많은 왕자가 있지만, 모든 이들과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꽤 친해진 것은 아마 우연이 기묘하게도 장난을 친 탓이 아닐까 생각했다. 같은 왕자 입장인 데다 영지도 가깝고, 나이까지 비슷했으니까.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똑같이 많은 것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절로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그 당시에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너의 성에서 지낼 무렵,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네 얼굴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 젠장.”
세상모르고 잠든 네 얼굴을 보자마자 욕지거리를 뱉은 나는 바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놀라서 깬 너는 졸음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멍하니 나를 올려 봤다. 나는 그런 네게 화를 냈다.
“왜 네가 여기 있어?”
“… 여기 내 방인데.”
나는 그때야 방을 잘못 찾은 것을 알았다. 그리곤 조금 부끄러워졌으나, 되려 네게 짜증을 내며 네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곤 일방적으로 토라져서 한동안 네 쪽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헤프닝이 몇 번 있긴 했지만 그래도 너와 나는 제법 괜찮은 친구 사이였다. 여느 또래 애들이 그렇듯 싸우는 일도 잦았고, 서로 씩씩대며 돌아서는 일은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대부분 함께였다. 조금 더 자란 후에는 어린 카노토를 같이 돌봐주는 일이 곧잘 생기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를 싫어하는 내 성정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심해졌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왕자’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 된 후엔 성의 사용인을 전원 여성으로만 고용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너는 괜찮았다. 내 세상에서 남자임에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존재는 카노토를 제외하면 네가 유일했다.
그만큼 소중한 너였는데, 나는 그 애의 존재 하나로 너를 미워하게 되어버렸다.
우습지 않아, 카노에? 우리는 그 애를 만나기 전부터 아주 오랜 시간을 공유해왔는데.
-
그 애를 처음 만난 것은 드림이터에 의해 정신을 잃은 뒤, 반지에서 깨어난 직후였다. 트로이메아의 공주인 그 애가 꿈왕족의 힘을 이용해 나를 깨워 준 덕분이었다.
흐린 시야가 또렷해지자, 그 애가 나를 내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내려 본 그 애의 갈색 머리카락이 살짝 흘러내렸다.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여긴….”
“정신이 들어요?”
내 중얼거림에 그 애가 물었다. 그 애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으나,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반짝거릴 때마다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나는 단번에 그 애가 썩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반지에서 깨어난 것도 고마운 일인데, 생김새까지 제법 예쁘장한 편이었으니. 내가 웃음 짓자, 그 애는 다소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렇구나…. 네가 트로이메아의 공주구나.”
중얼거리듯 건넨 내 말에 너는 구태여 답하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서선 내가 일어나며 매무새를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애가 손을 내밀어주길 기대한 것은 아니라, 제대로 선 뒤에야 그 애를 다시 마주 봤다.
“구요의… 미의 일족의 왕자 히노토라고 해.”
“시츠키예요.”
내 소개에 그 애는 제 이름을 그렇게만 밝혔다. 표정도 그랬지만 말투 역시 생김새와 판이하게도 딱딱했다. 그것이 흠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 각자의 성격도 다르니까.
아무튼 나는 그 애를 성으로 초대하고자 했다. 그 애는 내게 있어 은인이었고, 그런 존재에게 마땅한 대접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 애에게 우리 성으로 오지 않겠냐 물었다.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그러나 그 애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니, 나를 한 번 보고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하는 것이다.
“일정이 있거든요. 당장 방문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완전히 거절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답에 나도 모르게 살짝 안도했다. 그리고 다시 싱긋 웃었지만, 그 애의 얼굴은 여전히 목석같았다. 그래도 아까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일정을 마치면 올 수 있는 거지?”
“그렇죠.”
“그렇다면….”
그 애의 대답에 나는 말끝을 흐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 애는 나보다 꽤 작은 편이라 무릎을 굽히기도 해야 했다. 그제야 눈높이가 맞아, 같은 위치에서 그 애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예쁜 보라색이었다.
“다음에 다시 시간을 내줘.”
그 말에 그 애는 답하지 않았다. 나도 대답을 종용하며 건넨 말은 아니었다. 그 애가 굳은 얼굴 그대로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데 반해, 나는 그 애를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희한하게도.
“나와 너의 약속이야?”
“… 그래요.”
마지막으로 덧붙인 질문에는 순순히 답을 해 주었다. 그 말에 나는 만족하곤 다시 허리를 폈다. 그 애는 내가 일어나는 것을 올려 보면서 말을 맺었다.
“일정이 끝나면 방문 전에 미리 연락드릴게요.”
“… 응. 꼭 그렇게 해 줘.”
선뜻 대답하는 그 애에, 나는 어쩐지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애는 짧게 고개 숙이며 인사하곤 내게 등을 보이며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애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뒷모습을 보며 웃고만 있었다.

그 애의 연락이 온 것은 그러고도 사흘가량이 지난 뒤였다. 엿새째 되는 날 도착한 편지는 정갈한 필체로 씌어 있었다. 사나흘 내로 미의 일족 성에 도착할 것 같다는 편지는 그 애의 말투처럼 무뚝뚝하면서도 다소 딱딱한 내용이었다.
“기분이 좋으신 것 같군요.”
비서가 그리 일러 준 뒤에야 나는 내가 내내 웃고 있던 것을 알아챘다. 조금 당혹하여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나를 봤다.
“기다리셨던 편지인가요?”
“… 뭐?”
“며칠 내리 편지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았나요? 기다리던 편지를 받으셨나요?”
그 말에 나는 혼자 놀라서 편지를 한 번 내려봤다가 다시 비서를 올려봤다. 그녀는 여상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내가 그 애의 편지를 기다렸다고.
그제야 그 애를 보며 계속 웃고 있던 내가 떠올랐다. 아무런 표정 없던 그 애에 반해,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지. 다행스럽게도 그 애는 내가 곤혹을 치르기 전에 떠나갔지만, 나는 그 뒤로도 종종 그 애를 떠올리곤 웃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그것을 상기하고 나니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곤 그 애의 편지를 갈무리하며 비서에게 대답했다.
“응. 손님이 올 예정이야.”
“응대를 준비할까요?”
“… 응. 트로이메아의 공주니까… 최대한 정중하게 대접할 수 있도록 해 줘.”
그 말에 비서는 대답하듯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곤 내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책상 위를 돌아봤다. 그 애의 편지가 곱게 접힌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보다가 일주일쯤 전에, 그 애를 만났던 일을 다시 상기했다.
그러고 나니 문득 그 애를 만나기 전, 혼자 달을 올려 보던 날이 떠올랐다. 비서는 그날 내게 외로워하는 것 같다 이야기했고, 나는 그 말을 곱씹다가 문득 달을 올려 봤었다.
그리곤 저 달에서 나만의 공주님이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중얼거렸었지.
내가 이야기하고도 터무니없다고 생각해서 흘려 넘겼었는데 달이 그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한 건지. 때맞춰 나타난 그 애가 정말로 ‘달에서 내려온 공주’ 같다고만 생각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조바심을 내며 그 애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공무 중에 몇 번이고 달력을 들여다보기도 했고, 휴식 시간에는 혼자 안달복달하며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비서와 몇몇 시녀들은 그런 내 행동들에 질려버리기까지 했다.
내겐 영원 같은 한때였지만, 따지자면 사나흘은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 애는 금방 성에 도착했다. 그즈음 나는 모든 일을 제쳐 두곤 아침부터 성 입구에서 왔다 갔다 하며 그 애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그 애의 모습이 보인 순간, 나는 체통이니 뭐니 하는 것도 잊고 그 애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애는 전에도 그랬듯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이었으나, 내가 그럴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당혹한 기색을 띠긴 했다.
“기다렸어, 공주. 일부러 와줘서 고마워.”
그 애에게 어떻게 건넬까 고민했던 수십 개의 인사말은 전부 하얗게 스러지고 그 한마디만 흘러나왔다. 내가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을지, 혹 이상해 보이지는 않을지. 하나하나가 전부 신경 쓰였다.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애는 의례적으로 그리 답했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인데도 그것이 지극히 그 애답다고 생각해,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애는 그런 나를 흘긋 보고는 얌전히 서 있었다.
그 애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려다 멈칫하곤 조용히 거두었다. 그 애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그 애가 눈을 들어 나를 봤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 애에게 제안하듯 물었다.
“그럼 우선 성을 안내할까?”
그러자 그 애가 처음으로 웃었다. 무뚝뚝하던 얼굴이 사르르 풀어지고 드러난 미소가 무척 사랑스러워서, 순간 나도 모르게 얼빠진 표정을 지을 뻔했다.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 애는 순순히 내 손을 잡아 왔다.
“네,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나를 올려 보는 표정이 참으로 눈이 부셨다. 환한 얼굴도 아니었고, 그저 입꼬리를 당겨 잔잔히 웃은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 얼굴을 보는 게 왜 그리도 힘이 드는 건지. 어떤 정신으로 그 애를 안뜰로 데려갔는지도 여즉 기억나지 않았다.

그 애가 우리 일족의 성에 찾아온 것은 기원 의식을 앞둔 시기였다. 나는 그 애를 데리고 신악전으로 향했다. 올해는 신의 일족이 의식의 공연을 도맡은 해였다.
“여기는 어디예요?”
“기념 의식이 행해질 신악전이야. 내 차례는 작년이었으니까 그때 보여줬으면 좋았겠지만….”
말하고 나니 조금 불만스럽기도 했다. 그 애를 일 년만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우리 일족이 공연하는 모습을 그 애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 테니까.
“이번에는 카노에가 하는데…. 뭐 알아서 잘하지 않을까.”
“카노에가 누군데요?”
그 애의 입에서 네 이름이 흘러나왔다. 고작 이름일 뿐이고, 충분히 물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나는 어린애마냥 불만스러워져서 순순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자, 시작한다.”
그 애의 시선이 무대를 향한 순간 피리 연주가 시작되었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에 맞춰 네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단정히 앉아 공연을 보던 그 애의 몸은 시간이 갈수록 앞으로 쏠렸다. 다른 때였다면 나는 네 공연에 집중하고 있었을 텐데, 그날은 그렇지 못했다.
그 애의 보라색 눈동자가 정신없이 네 움직임을 좇았다. 그 애는 네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관심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불행하게도 나였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 애는 여운에 젖은 듯 멍하니 무대를 내려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 애의 옆얼굴을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 애가 헛기침하곤 다리 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무척 멋졌어요.”
“너를 위해서 특별히 좋은 자리를 준비했어.”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네면서도 그 애의 시선은 무대 위, 네가 있던 자리를 훑고 있었다. 그런 그 애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긴 했으나…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애와의 이야기가 그칠 즈음 비서가 다가왔고, 나는 그제야 겨우 정신머리를 붙잡았다.
“히노토 왕자님, 이 뒤에 전임자로서 인사를….”
… 그러고 보니, 그런 것을 준비해야 했었지.
고개를 돌리니, 그 애는 가 보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뱉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애를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내가 무대에서 선 곳은 네가 공연의 시작을 알린 곳이었다. 너는 이 자리에서 날아오르듯 약동했는데, 나는 가만히 인사말만 꺼내다니. 대조되는 상황이 퍽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을 뻔했다.
“―미의 일족의 왕자, 히노토다.”
그리 운을 떼고 의례적인 인사말을 꺼냈지만,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애는 가만히 앉아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으나, 내 머릿속에선 그 애가 너를 좇던 시선이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기념 의식 이후, 그 애는 우리 영지를 떠나갔다. 공교롭게도 네가 드림이터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탓이었다. 덕분에 나를 비롯한 궁의 사용인들은 제대로 구색조차 갖추지 못한 채 그 애를 배웅했다.
“며칠간 잘 쉬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또 뵙길 바라요.”
“… 나도 즐거웠어, 공주.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게 허락된 것은 그 정도의 인사가 끝이었다. 그 애는 급히 신의 일족 영지 쪽으로 떠났고, 사용인들은 그제야 조금씩 흩어졌다. 나는 멍하니 서서 그 애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만 있었고, 비서가 내 곁에 조용히 서 있었다.
“따라가지 않으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비서는 지극히 사무적인 얼굴로 그 애가 서 있던 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돌아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왕자님께선 트로이메아의 공주님을 마음에 두신 줄로만 알았습니다만….”
“… 아아.”
그 말에 나는 다시 고개 돌려 정면을 봤다. 어슴푸레한 해 뜨기 직전 하늘에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그 달이 그 애를 닮았다고 생각하여, 나는 멍하니 그것을 올려 보고만 있었다.
… 그래. 우습게도 나는 그 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애를 알게 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처음에는 그 애가 단순히 여자라, 생김새가 마음에 들어서. 딱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다른 여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애에겐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애는 조금 더 특별했다. 잘 보이는 것 이상으로 뭐라고 할까….
그냥,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면 닿고 싶었고, 입을 맞추고, 그 애를 안고 싶었다. 그 애는 자꾸 그렇게 욕심이 났다.
그래서 알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너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내게 향한 것 이상으로 그 애의 신경이 너에게 쏠려 있었다.
보통 때라면 영지가 가깝다는 이유로, 그 애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네 대신 드림이터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쫓아갔을지도 모른다. 댈 수 있는 핑곗거리가 수십 가지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던 것은….
결국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 채 비서를 돌아보곤 말없이 웃었다. 그녀도 나를 한 번 보고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애를 닮은 그믐달 너머로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 애를 다시 만난 것은 의식 이후, 축하 연회가 열릴 즈음이었다. 너는 감사를 표할 겸 정식으로 그 애를 초대했고, 그 애는 참석 의사를 밝혀 왔다. 때문에 그 애를 다시 만난 날, 내 곁에는 너와 카노토가 있었다.
“… 트로이메아의 공주, 정말 미안하다.”
네가 그 애에게 건넨 사과였다. 여성을 처음 만난 카노토는 신기하다는 듯 그 애의 몸을 더듬거리며 만지고 있었다. 그 애가 당혹하여 얼어 있을 정도였다.
“만지는 거, 안 돼?”
“안 돼. 트로이메아의 공주는 여자아이잖아.”
“여자아이…?”
내 제지에 카노토는 손을 떼긴 했지만,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너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애에게 무어라 이야기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네가 카노토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미안하다. 그… 카노토에겐 사정이 있어서, 세상 물정을 잘 몰라.”
“네….”
나는 그리 대답하는 그 애가, 전에 내게 그랬듯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애는 너를 보면서 가볍게 웃고 있었다. 내게 보인 것과는 판이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질투에 미쳐버렸다는 이들을 이해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질척하고 추잡한 감정이라, 내 자신이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과음한 것 같았다. 씁쓸한 기분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보다 술기운이 빨리 오른 것을 둔해진 감각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열기를 식힐 목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카노토가 나를 돌아봤다. 어디 가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머리에 손을 얹자,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카노토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히노토 형, 어디 가?”
“잠깐 머리 좀 식히러. 카노에는?”
“카노에 형…. 밖에.”
그 말만 듣고는 다시 발을 뗐다. 술에 약한 네가 머리를 식히려 자리를 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적당히 이야기하다 보면 취기는 금방 가시겠지.

사람들 사이에서 떨어지니 서늘한 밤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조화의 달을 앞둔 지금은 갈수록 공기에 찬기가 섞여 들어가는 시기였다. 입을 열자, 따뜻한 숨이 희게 얼어붙었다. 그것이 엷어져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발을 뗐다.
너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른 때였으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질 못했다. 너는 그 애의 무릎을 벤 채 손을 쥐고 있었다. 내가 말을 걸지 못하고 멈춰 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너는 살짝 몽롱한 얼굴로 그 애를 올려 보며 무뚝뚝하게 이야기했다.
“앞으로도 곁에 있어.”
“… 카노에.”
그 애가 네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머리가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애가 내 이름을 부른 적은 없었다. 당연히 네게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대답은?”
네 물음에 그 애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더니 곧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내 존재 자체를 나락으로 처박기엔 충분했다.
너와 그 애가 연인이 되었다.
-
강한 햇살에 나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어제 오전까지만 해도 비가 지독하게 오더니, 오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 하늘을 한 번 올려봤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날씨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바람도 적당히 선선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결혼하기엔 더없이 완벽한 날이었다.
그 애와 네가 결혼한다.
너는 결혼 사실을 내게 가장 먼저 알려 왔다. 너와 그 애가 연인이 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신의 일족 사이에서도 결혼 이야기가 종종 화두에 올랐으니까.
다만 네 성정 상 결혼을 서두르고 싶어하진 않았을 터였다. 해서, 내게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꽤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네 이야기에 꽤 충격을 받았음에도 그 이야기를 웃으며 받아들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웃는 쪽을 택했다.
“… 축하, 해.”
건넬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너는 조금 부끄러운 낯으로 고맙다 답했다. 너도, 나도 꽤 바빠서 오랜만에 만난 날이었다. 그 이야기 이후로도 우리는 꽤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간만의 회포를 풀기 위해서였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으려 정신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너는 결혼 소식을 밝히곤 한시름 던 듯했으나, 나는 여상스럽게 행동하려 애썼다.
그러니 만남을 파한 이후엔 지쳐서 주저앉는 것이 당연했다. 사용인들이 놀라서 나를 부축했고, 나는 그녀들에게 반쯤 매달린 채 비척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정말 하염없이 누워있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누워선 천장의 무늬를 세었다. 당연히 잠들지도 못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그 애가 사랑한 사람이 네가 아닌 나였다면 어땠을까’ 따위를 상상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네가 그 애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너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내가 그랬듯 스스로의 감정을 숨겼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너는 정에 약한 사람이고, 친한 친구의 사랑을 기꺼이 응원해주었을 테니.
반면에 나는 어땠나.
나는 한 번도 너와 그 애의 사랑을 응원한 적 없었다. 단념해야 함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애를 강제로 곁에 붙잡아 두는 것도, 그로 인해 너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도 상상해 봤다.
그 애는 내 곁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 줄 자신도 있었다. 너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그렇게 자신했다.
… 그럴 수 없던 것은 너 역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너와 그 애가 행복하길 바라기도 했다. 물론 그런 생각이 오래가진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함께 거리를 걷는 그 애와 너를 보면 다시 속이 끓어올랐으므로.
그 때문에 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몇 년을 보냈다. 사람의 마음이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터라, 나는 그 시간 내내 혼자 괴로워하기만 했다.
“히노토 형.”
상념을 깨뜨린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카노토의 목소리였다. 돌아본 그는 관계자용 정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채였다. 몇 년 간 부쩍 자란 카노토는 이제 나와의 키 차이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 모습이 제법 어른스러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옛날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는 않았다.
“기분… 이상해.”
“그래?”
“응…. 카노에 형이랑, 시츠키가 결혼한다니.”
“이제 형수라고 해야지.”
핀잔을 주며 나타난 이는 너였다. 순간 엉망으로 풀어질 뻔한 표정을 얼른 다잡으며 웃었다. 그런 나를 본 네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상하지 않아?”
“괜찮은걸. 잘 어울려. 의외로.”
“의외로는 또 뭐야.”
덧붙인 말에 투덜거리면서도 너는 피식 웃었다. 긴장을 감추지 못한 얼굴은 다소 딱딱하게 굳어 있었지만, 그 애를 보는 순간 전부 괜찮아질 것을 알고 있었다.
“긴장돼?”
“… 조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반쯤 놀리듯 건넨 말에 너는 인상을 구기곤 나를 돌아봤다. 귓바퀴 부근이 머리카락만큼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너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결혼, 축하해.”
그 말에 너는 살짝 놀란 얼굴을 하며 나를 봤다. 그리곤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고맙다.”
그 표정이 참으로 눈부셔서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누군가가 너를 불렀고, 너는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곤 떠나갔다. 나는 네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멀거니 서 있었다.
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카노토는 다시 내 쪽을 돌아봤다. 그리곤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질문을 건넸다.
“히노토 형, 서운해?”
“… 그런가 봐.”
혹 카노토가 다른 낌새를 알아챌까, 얼른 단정하듯 대답하곤 하늘을 올려봤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정말로, 결혼하기엔 더없이 완벽한 날이었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트로이메아와 구요 사이에 치러진 국혼이었으니, 동원된 모든 인력이 최선을 다했음이 분명했다.
구요의 왕자 중에선 신이 대표로 축사를 읽었다. 너는 그 모든 말을 경청했고, 이야기가 맺어질 즈음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신은 너와 그 애의 결혼식을 기꺼이 축하했다.
그 애의 인형 같은 집사는 종종 눈물을 닦았다. 그 애 역시 집사가 신경 쓰이는 듯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봤으나, 종내에는 환하게 웃었다. 집사도 그 애와 너를 축하하며 작은 손으로 열심히 박수를 쳤다.
그 애는 애틋한 얼굴로 집사를 보다가 너를 돌아봤다. 그 모습이 참으로 예뻐서, 나는 또 눈을 떼지 못했다. 식 중이라 모든 이들의 시선이 너와 그 애에게 집중된 것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때의 나는 멍청하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을 테니.
피로연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네가 몇 번이고 권유했으나, 꼭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너는 아쉬운 얼굴로 추후의 만남을 기약했고, 나는 식장을 떠났다.
그리하여 영지로 돌아온 것은 저녁 즈음이었다. 문득 혼자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문에 들어선 뒤엔 모든 사람을 물리고 혼자 본성으로 향했다. 땅을 보며 천천히 걷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 진 붉은 하늘이 제 몸을 푸른 빛으로 물들이던 참이었다. 짙푸른 색과 붉은색이 섞이며 어우러진 하늘은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고작 그 색이 뭐라고, 나는 그게 그 애의 눈동자와 같은 색이라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정경이었는데.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서 보라색 하늘은 점차 짙은 푸른색으로 물든다. 그러고 나니 하늘에는 달이 떴다. 그 애를 닮은 그믐달이었다. 그래서 더 발을 떼지 못하고 멈춰 서서 멍하니 그것을 올려봤다.
“저 달에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말끝을 흐리며 눈을 깔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나만의 공주님이 내려오지 않으려나.”
긴 갈색 머리카락을 나부끼고, 보라색 눈을 반짝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제 와선 다 헛된 망상이다. 그런 것을 상상해본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곤 눈을 감아버렸다. 칠흑 같은 시야 너머로 그 애가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딱 오늘만. 오늘까지만 이 마음을 간직하자. 오늘이 지나고 새로운 아침이 오면, 그땐 정말로 이 마음을 흘려보내자.
다시 눈을 떴다. 뿌옇게 차오른 시야에 그믐달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막 해가 졌으니, 아침이 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남아있었다.





카노에 편 cm by. 이드님

더보기

구태여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애석하게도 금방 알아차리는 법이다. 이를테면 그래, 내 소꿉친구가 내 연인을 두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그 애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분명 드림이터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기억이 통째로 잘려 나간 듯 사라졌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숲에 홀로 누워 있던 상황이었다.
“여긴…?”
“정신이 좀 드세요?”
나도 모르게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니, 낯선 목소리 하나가 물어 왔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마주 봤다.
그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보라색 눈동자였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그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순간 넋을 잃었던 것 같다.
그 눈은 내가 이제껏 봐 온 것 중 가장 예뻤다. 다만 나는 미려한 것을 말이나 글자로 표현하는 데에 능숙하지 못한 사람이라, 그 애를 멍하니 보는 것만 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아?”
“드림이터에게 당해서 잠들어 있었어요. 제가 지금 당신을 깨운 참이고요.”
그 애는 그리 담백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드림이터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동시에 내가 잠든 동안 영지가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기도 했다.
“신의 일족 영지는 괜찮아요. 오면서 직접 봤어요. 드림이터에게 당한 사람들이 조금 있긴 했는데, 지금은 전부 무사하고요.”
그런 내 속내를 읽기라도 했는지, 그 애는 영지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제야 그 애가 누구인지 묻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나를 깨운 점이나, 드림이터에게 당한 사람들이 ‘지금은’ 무사하다고 얘기한 것을 보면….
“… 트로이메아의 공주인가?”
말해놓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멍청히 물은 것 같아서였다. 그 애는 그런 나를 한 번 보곤 피식 웃었다. 그리곤 눈을 내리깔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모습에, 나는 또 넋을 잃고 만다. 시선이 그칠 줄을 모르고 그 애를 좇았다.
“네. 시츠키라고 해요.”
“… 시츠키.”
그리고 그 애가 밝힌 이름을 나는 몇 번이고 입 안에서 굴렸다. 시츠키, 시츠키, 시츠키. 그 이름은 어떤 것을 뜻할까. 나도 모르게 그것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일단은 그 애를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애는 우리 영지의 피해를 수복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왕자 된 자로서, 정식으로 초대하여 보답하는 것이 의무였다.
“고맙다, 트로이메아의 공주.”
그래서 일단 감사 인사를 했다. 그 애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제가 해야 했던 일인걸요.”
“그래도 내 쪽에서 감사해야 할 일이 맞아. 그러니 정식으로 영지에 초대하고 싶다.”
그 말에 그 애는 아무런 표정 없이 나를 보다 가볍게 웃었다. 그 바람에 나는 또 넋을 잃었다가, 혼자 놀라선 그 애의 시선을 피했다. 절로 커진 목소리가 새어 나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환대를 준비하겠다! 트로이메아의 공주, 당신은, 시간이 괜찮다면, 우리 영지로….”
“좋아요.”
채 맺지 못하고 흐린 말에 그 애가 대답했다. 횡설수설하며 이어지던 목소리도 그것을 듣곤 그쳤다. 때맞춰 바람이 불었고,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한 번 일렁인 머리카락을 갈무리해 귀 뒤로 넘긴 그 애가 웃었다.
“마침 지내던 곳에서 떠나온 참이었어요.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 어, 어어.”
나를 보며 그리 묻는 모습은 또 왜 그리도 예쁜 건지. 또 넋을 잃고 멍청하게 흘러나온 답이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애는 먼저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멍청히 그것을 보다가 잡으며 일어났다. 한 손에 다 들어오고도 남는 작은 손이 부드럽고, 또 따뜻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돌아갔다. 내가 잠들어있던 곳은 영지 근교의 숲이었다. 그제야 드림이터의 흔적을 쫓다가 그곳으로 들어선 기억이 떠올랐다. 버거운데도 혼자 드림이터를 상대하려 하다가 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잠들었었지.
나란히 걷는 내내, 나는 옆에서 말없이 걷는 그 애를 신경 쓰기 바빴다. 몇 번이고 말을 붙이려다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그것이 또 막막하기만 했다.
“… 여기 오기 전엔 어디 머무르고 있었나?”
그래서 겨우 끄집어낸 질문이 저런 것이었다. 그 내용이 불쾌하진 않았을까 싶어 눈치를 살폈으나, 그 애는 기분이 상한 기색을 내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대답했다.
“미의 일족 영지요.”
그리고 달려온 답에 머릿속이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미의 일족 영지. 네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너는 나와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 왔다. 나는 그만큼 네 성정에도 익숙했다. 너는 유별날 정도로 여성을 좋아하고 남성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절로 불안이 일었다. 네가 먼저 그 애에게 손을 대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다른 여성들을 가까이하든 말든 평소엔 신경도 쓰지 않던 것에 비하면 묘한 심경이었다.
그것이 이리도 신경 쓰이는 것은, 그 애가 눈앞에 나타난 것으로 내 시선을 전부 앗아가 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그 애를 돌아보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눈앞이 잠시 혼미해져서, 자주 오가던 길이라 익숙하게 걸을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 그런가. 혹시 히노토… 미의 일족 왕자를 만났나?”
“네. 깨워 드린 보답으로 초대를 받아서, 얼마 전까지 미의 일족 영지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떠보듯 건넨 질문에 그 애는 순순히 답했다. 그러나 나는 그 애를 지켜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 애가 너와 어느 정도 이상의 관계를 맺었다면 미리 선을 그어 두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애는 너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선, 내게 다시 질문을 건넸다.
“히노토 왕자랑은 잘 아는 사이신가 봐요.”
“…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다. 영지가 가깝기도 하고.”
“… 그래요?”
그리 반문한 그 애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보석 같은 눈동자가 의외라는 듯 나를 올려 보고 있었다. 어느새 걸음도 멈추고선, 그 애는 나를 빤히 봤다. 그래서 나도 조금 앞선 곳에서 멈춰 서선 그 애를 돌아봤다.
“… 의외라고 생각해?”
“음…. 네.”
툭 던지듯 건넨 질문에 그 애는 긍정하는 답을 해 왔다. 다소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긴 했으나, 선뜻 대답한 것이 또 조금 황당했다. 그 애는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곤 다시 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서로 너무 달라서요.”
그리고 이어진 부연에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너와 나는 타고난 기질이 워낙 다르긴 했다. 영지 간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었다면 그다지 가까워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만큼 썩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릴 땐 서로 싸우고 말도 섞지 않던 날들이 수두룩했으나, 지금 시점에선 가끔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곤 웃어넘기기도 했다.
“… 미의 일족 영지에서는 어떻게 지냈지?”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히노토 왕자와 영지를 구경하고… 아.”
다시 건넨 물음에 답하던 그 애는 별안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하던 것을 그쳤다. 다시 돌아보자, 그 애는 나를 향해 한 번 웃어보이곤 말을 꺼냈다.
“같이 기념 의식을 봤어요. 거기서 카노에 왕자의… 당신의 공연을 봤고요.”
“… 뭐?”
그 말에 당황하여, 얼빠진 얼굴로 그 애를 돌아봤다. 아마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 애는 가볍게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 공연이 무척 기억에 남아서 카노에 왕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그 말에 조금 놀라선 그 애를 보다가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절로 입꼬리가 치켜 올라가는 탓에, 우스운 꼴을 보일까 봐서였다. 그 애 앞에선 그런 얼굴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덩치가 크고 인상도 사나운 탓인지, 주변으로부터 무섭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다. 그런 이야기가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주변으로부터 호감을 얻기 쉬운 생김새는 아닌지라. 그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래서 가끔은 너를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너는 생김새부터 부드러운 데다, 호감을 사기도 쉬운 인상이었으니. 어쩌면 그런 면에 여성들이 끌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 기억에 남았어?”
“네. 무척 멋있었어요.”
그래서, 처음 만난 날 그리 이야기해 준 그 애에게 더욱 끌리게 된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간 질문에 그 애는 그리 답해 주었고, 나는 그런 뒤에야 네가 그 애와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면 그 애 쪽에서 먼저 내게 선을 그었으리라.
그런 것을 생각하고 나니 어쩐지 기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네가 여성을 좋아하는 만큼 손이 빠른 것도 잘 알고 있었으니. 네가 그 애와 이미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닐까 예단하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애는 너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거리낄 것은 없었다.
다시 돌아본 그 애는 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옆에서 조용히 걷고만 있었다. 그래서 제대로 그 애 쪽으로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 연회가 예정되어 있다.”
대뜸 꺼낸 말에 그 애가 다시 나를 올려 봤다. 그제야 아차 했다. 말을 조금이라도 정리하고 꺼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도 이미 한 말을 무를 수는 없어, 입술을 한 번 짓씹었다가 다시 이었다.
“의식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것을 기념할 겸 신년을 축하하는 자리야. … 괜찮다면 트로이메아의 공주, 너도 그 자리에 와 주었으면 해.”
그 애는 내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곧 사르르 웃었다. 참으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표정이라, 나는 또 바보같이 넋을 잃고 만다. 오늘만 해도 그 애에게 몇 번이나 시선을 빼앗겼는지, 손가락으로도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네. 꼭 참석할게요.”
그리고 돌아온 확답에 속으로 또 얼마나 안도했던가. 우리 사이엔 다시 아무런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으나, 나는 그동안 혼자 들떠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곁에 있는 그 애가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속으로 그것을 달래는 것이 꽤 많이 고되었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애의 얼굴이었다. 그저 찬 바람에 눈을 떴을 뿐인데, 그 애가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퍼뜩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 애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내가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뭐, 뭐야?! 내가 왜 네….”
급하게 입을 열었으나, 차마 뒷말을 잇지는 못했다. 조금 전까지 내가 그 애의 다리를 베고 있었다는 생각에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애가 선뜻 입을 열었다.
“카노에가 취한 것 같아서요.”
그 입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바람에 나는 더욱 당혹하여 그 애를 봤다. 나는 지금껏 그 애를 ‘트로이메아의 공주’라 칭해 왔고, 그 애도 내게 예를 갖춰 ‘카노에 왕자’라는 호칭을 고수했다. 요컨대 서로 편하게 이름을 부를 만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꽤 친근하게 들릴 법한 어투로 그 애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 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붙여 왔다.
“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기억 못 하세요?”
“이야기…?”
멍청하게 그 애의 말을 따라 하면서 잠들기 전의 기억을 애써 더듬어 떠올렸다. 신년 축하를 겸한 자리인지라 많은 이들이 모였고, 권하는 술들을 채 다 거절하지 못해 몇 잔 마시긴 했다. 그리고 취해서 쉬던 중에….
그 애가 다가왔었다.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자, 그 애는 나를 부축하다가 앉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었다. 나는 그것보단 눕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리고선….
“… 생각났어.”
기어들어 가는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맘대로 네 무릎에 머리를 얹고….”
거기까지 이야기하고선 말을 흐려버렸다. 취했다곤 하지만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 애가 불편할 상황을 만든 것도 죄스러웠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 폐를 끼쳤다.”
“괜찮아요. 저는 싫지 않았고… 오히려 평소와는 다른 카노에를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퍽 의외의 것을 얘기하고 있어서, 조금 놀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웃고 있는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선 다리 위에 모아 쥐고는 다시 입을 뗐다.
“카노에가 어쩐지 어린아이 같아서 무척이나 귀여웠어요.”
“으악!”
그 애의 말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귀엽다는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절로 얼굴이 달아올라선, 다시 그 애의 눈을 피해버렸다. 제대로 마주 볼 수도 없어서.
“…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야. 남들은 항상 나를 무서워하기만 했으니까.”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나니, 다시 그 애를 처음 만난 때를 떠올렸다. 그 애는 너를 먼저 만났음에도 나를 보곤 멋있었다고 말해주었고,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취한 채 건넨 ‘계속 곁에 있어.’ 하는 무뚝뚝한 고백에도 순순히 그러겠노라 답해 주었다.
그 뒤론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도 모르겠다.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한다며 횡설수설 꺼낸 말에, 그 애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다 다시 한번 제대로 꺼낸 고백에는 당혹스러워하다가 이내 사랑스럽게 얼굴을 붉혔다.
크게 심호흡을 하곤 다리 위에 얹어둔 손을 세게 쥐었다. 그리곤 그 애를 똑바로 돌아보며 제대로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 다시 말할게.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 나도 평생 너의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너를 절대로 놓지 않을게.”
그리곤 무어라 더 부연할까 고민하다, 그냥 그 애를 안아버렸다. 그 애는 답하듯 내 등에 팔을 둘렀다. 품 안을 채운 그 온기는 무척 사랑스러웠으나, 그곳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는 없었다. 내 눈은 그 애의 등 너머, 어느 한 곳에 박아 넣은 시선을 뽑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의 일을 떠올리며, 자연히 주변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기억해냈다. 내가 그 애의 무릎을 베고선 고백하던 때, 너는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취한 탓에 가늠하는 것은 다소 힘들긴 했으나,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너와 함께 해 왔고, 네가 내는 기척은 누구보다 잘 알았으므로.
네가 지켜보는 것을 알았기에 오히려 더 직설적으로 그 애에게 고백했었다. 동시에 너에게 경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애는 이제 내 사람이니 섣불리 손을 댔다간 친구라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나는 네가 그 애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다른 여성들과 달리 그 애를 유난히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 애가 네게 무뚝뚝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여하튼, 덕분에 나는 네가 그 애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너는 그 애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었다. 다른 여성들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아마 그랬기에 너는 그 애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론 더 거리를 두어야 할 테지. 그 애와 내가 연인이 되었고, 너는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되었으니까.
… 우리 오랫동안 함께 해 왔지, 히노토.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는 아마 내가 제일 잘 알 거야.
나를 미워해도 상관없어. 그래도 돼.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테니.
-
“… 곧 결혼해, 시츠키랑.”
그 말에 네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그래, 술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던 것이 기억났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였고, 그간의 안부를 묻기 전에 꺼낸 이야기였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해, 대신 차를 마시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엔 한 잔 정도 마시고 술기운을 빌리는 편이 좋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 축하, 해.”
잠시 멍하니 나를 보던 너는 웃으며 답했다. 그 말에 어쩐지 부끄러워져, 나는 네 시선을 피하며 고맙다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오랜 시간 함께 시간을 보냈다. 너와 나, 둘 다 무척 바빠서 만난 것 자체가 긴 시간만이었으므로. 그 시간 내내 네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그 애를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고 생각했다. 너와 그 애가 만나지 않은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원래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었다. 너에게 그 애도 그랬을 것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너를 조금 더 편하게 대했던 것도 같다. 그 애를 만나기 전처럼, 막역했던 관계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너는 내게 가장 친한 친구였고, 그 애가 얽히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불편할 상황도 없었을 테다. 그래서 네 안색을 살피고, 조금 안심했었다.
…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고 해도 긴장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는데 관계자용 정복을 갖춰 입은 너와 카노토가 눈에 들어왔다. 성인이 된 카노토는 키도 제법 많이 자라서, 언뜻 보기엔 너와 엇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 온 만큼, 너와 카노토를 보니 조금 긴장이 풀린 것도 같아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기분… 이상해.”
“그래?”
“응…. 카노에 형이랑, 시츠키가 결혼한다니.”
“이제 형수라고 해야지.”
카노토는 아직도 그 애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에게 핀잔을 주자, 네가 나를 돌아봤다. 그러니 괜스레 조금 어색해져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익숙하지 않은 신랑 복장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이상하지 않아?”
“괜찮은걸. 잘 어울려, 의외로.”
“의외로는 또 뭐야.”
짓궂은 어투로 덧붙인 말에 투덜거리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네 덕분에 다소 풀리긴 했지만, 여전히 긴장한 얼굴이 경직된 게 느껴졌다. 너도 그것을 눈치챈 듯 다시 말을 걸어왔다.
“긴장돼?”
“… 조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그 답이 명백히 놀리는 듯한 어투라, 나는 인상을 구기곤 너를 돌아봤다. 귀 부근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너는 나를 보곤 웃다가 문득 시선을 한 번 내리깔았다. 그리곤 다시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뗐다.
“결혼, 축하해.”
그리 이야기하는 너는 웃고 있었으나, 어쩐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너는 아직도 그 애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 점이 의외라서 나도 모르게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네가 여성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그 애도 잊었을 것이라 안정했다.
그 애는, 네 안에서 그만큼 커다란 존재였던 것일까.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선 나와 친구로 남아있는 길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너는 그 애와 나의 결혼을 기꺼이 축하해 주었다. 그 심정이 애틋하게 여겨져,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다.”
그러자 너는 나를 따라서 웃었다. 마침 누군가 나를 불렀고, 네 앞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네 표정은 내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피로연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너를 몇 번이고 잡은 이유는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꼭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 오늘도 겨우 시간 내서 온 거야.”
“… 그래. 그러면 다음에 따로 만나자.”
“응.”
웃으며 대답한 너는 천천히 떠나갔고, 나는 네 뒷모습을 멀거니 보고 서 있었다. 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나는 그 자리를 쉬이 뜨지 못했다.
그 뒤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그 자리를 채운 모든 사람은 그 애와 나의 결혼을 축하하고 있었다. 더러는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고, 그 애의 손을 붙잡은 채 행복하길 바란다며 눈물짓는 이도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는 잠시 머리를 식히려 뜰로 나왔다. 술을 몇 잔 받아 마신 탓도 있었다. 옛날에 비하면 주량이 조금 늘긴 했지만, 여전히 잘 마신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크게 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 보니, 그믐달이 떠 있었다. 그 달을 보곤 나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그 애의 이름이 그믐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나는 그믐달을 좋아하게 되었다. 결혼식을 그믐날로 잡은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그 달을 하염없이 올려 보다가 나는 너를 떠올렸다.
너도 지금 저 달을 보고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결혼식은 우리 영지에서 열렸고, 미의 일족 영지는 여기서 멀지 않았으니까. 이미 성에 도착해선, 하늘에 뜬 달을 올려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 그 애가 나 대신 너를 사랑했다면, 나는 너처럼 그 애를 보내줄 수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그 애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본 적 없었으니까. 아마 그 애가 너를 사랑했다면… 네가 그랬듯 나도 그 마음을 쉬이 떨쳐내지 못했을 것이다.
“카노에.”
“아, 시츠키.”
다시 달을 올려보는데, 때맞춰 뜰로 나온 그 애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애를 돌아보곤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애도 따라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
곁에 선 그 애의 어깨를 감싸 안자 그 애가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 애를 보며 한번 웃곤 다시 달을 올려 봤다. 희미한 그믐달은 오늘따라 선연히 빛나고 있었다.




시츠키 편 by 선양

더보기

바람이 불어와 정리해놓은 머리카락을 다시 흩트려놨다. 다시 손으로 엉킨 것을 정리하니 네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너만 보면 미소 짓게 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웃고만 있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무표정일 때도 있었으며, 너와 그 사람이 걱정되는 마음이 표정으로 나타날 때도 있었다. 여느 연인들처럼 너에게 토라져선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어 내 마음을 표현해볼 때도 있었고, 나를 생각해주는 그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에 괴로운 심정이 얼굴에 드러날 때도 있었다.
그래도 너를 보며 웃고 있는 경우가 가장 많은 것 같아. 내가 이렇게나 많은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내가 웃으면 너도 나를 따라 웃었어. 나와 같이 평소에는 표정이 없고, 오히려 약간 험악한 표정을 곧잘 짓던 너인데, 귓가가 발갛게 물들며 미소 지어주는 네 표정을 보는 게 나에게 있어 얼마나 힘이 되던지.
한편으로는 미안하다는 마음이 강하게 밀려오는 때도 있어. 나와 네가 함께 있는 모습을 가장 근처에서 지켜보는 그 사람의 마음을 내가 모르고 있진 않으니까. 분명 상처받고 있을 텐데도, 너와의 우정과 나를 아껴주는 마음에 못 이겨 우리의 곁에 늘 같이 있어 주는 그 사람의 마음이 미안하게 느껴져 가끔은 괴로워.


카노에와 히노토는 흔히 말하는 소꿉친구와 같은 사이라고 들었다. 구요에는 자의 일족의 왕자인 신을 중심으로 12명의 왕자가 있지만, 그 왕자들이 모두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
그중에서도 카노에와 히노토는 가까운 영지에 서로 비슷한 나이여서 그랬는지 둘은 사이가 좋은 편이라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이일 거라며, 다른 왕자들이 그렇게 말해주었다.
어릴 때부터 각자의 일족의 왕자로서 자란 그들은 어린 나이부터 많은 책임감을 떠안고 자랐겠지. 어린 나이에 그건 지금의 우리들보다 더한 중압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서로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친해지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원령 무악’ 행사가 열릴 시기에 연이어 나타나는 드림이터들로 인해 개최가 위험해졌다는 연락을 받고 내빈자격으로 다른 왕자들과 함께 구요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다양한 이야기를 하면서 들었던 두 사람의 추억 이야기가 있었다. 다 함께 숲을 걷고 있을 때 카노토 왕자가 히노토에게는 무서운 이야기가 없냐며 물어봤고, 히노토는 자신에게도 어릴 때는 무서운 게 있었다면서 운을 떼었다.

“어릴 때 카노에네 성에 머문 적이 있었잖아?”
카노에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지, 특별히 기억나는 건 없다고 말했다.
“객실에서 자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옆에서 카노에가 자고 있었어. 상상이 가? 잠에서 깨니까 눈앞에 남자가 자고 있다니.”
“그게... 무서워?”
카노토 왕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었다. 뭐, 히노토의 남자를 싫어하는 성정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응. 엄청 무서웠어. 무서운 정도를 넘어서서 화가 끓어올랐지.”
“화를 내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 아니야? 네가 잠결에 방을 헷갈렸잖아? 게다가 꽤나 어릴 때의 이야기네.”
히노토는 어릴 때부터 남자를 싫어했으며 저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것은 카노에와 히노토의 사이가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를 싫어한다고는 하지만 카노토를 친형처럼 카노에와 함께 카노토를 돌보기도 하는 걸 보면, 그가 함께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아마도 카노에와 카노토 둘일 것이다. 그렇다고 히노토가 다른 구요의 왕자들에게 차갑거나 쌀쌀맞게 군다는 것은 아니다. 아, 예외적으로 이누이 왕자는 조금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지만.


내가 처음 히노토를 만난 것은 나비와 함께 달력의 나라 근처를 지날 때쯤 반지의 기운을 느낀 나비가 나를 히노토에게 이끌어주어서였다. 반지에 기도를 바쳐 그를 깨웠을 때, 꽤 오랜 시간 반지에 잠들어 있었는지 히노토는 눈이 부신 듯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여긴...”

“정신이 들어요?”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 변화가 참으로 신기했다. 햇빛에 눈이 부신 듯 찡그린 표정이었던 그는 나를 바라보고는 금방 웃었다. 그를 처음 만날 당시의 나는 아직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내가 자란 세계에서의 나쁜 버릇이 아직 남아있었다. 표정 변화가 별로 없었던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애교가 없다는 평을 듣고 자랐다. 아마 그를 바라보는 지금 나의 표정도 무표정일 것이다. 그런 나를 의식한 듯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네가 트로이메아의 공주구나.”
반지에서 깨워진 뒤에 그는 조용히 자신의 매무새를 정리하였다. 구태여 내가 그를 도울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구요의... 미의 일족의 왕자 히노토라고 해.”
“시츠키예요.”
구요에 방문하기 전, 간단하게 나비에게 설명을 들었었다. 달력의 나라 구요에는 12명의 왕자가 있다고.
“혹시 너만 괜찮으면 성에 초대해도 괜찮을까? 날 구해줬기도 하고 그 보답을 하고 싶어서.”

왕자들을 구하고 나면 항상 왕자들은 자신들의 성으로 날 초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슬슬 트로이메아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나는 그의 제안을 이번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거절의 말을 건네자 그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완전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닐 테니, 적어도 트로이메아에 돌아가서 일을 본 뒤에 방문하기로 생각이 섰다.
“일정이 있거든요. 당장 방문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자신의 제안이 완전히 거절당한 게 아니라는 것에 기쁜 듯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참으로 웃는 게 예쁜 왕자라고 생각했다. 수려한 얼굴에 그에 어울리는 하얀 곱슬머리는 마치 양털처럼 복슬거려 그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일정을 마치면 올 수 있는 거지?”
“그렇죠.”
“그렇다면....”

나의 대답에 그는 말끝을 흐리며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가 나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주자, 그의 눈을 조금 더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옅은 노란색의 예쁜 눈이었다.
“다음에 다시 시간을 내줘.”
그다음이 언제일지, 내게 정해달라고 그는 말하였다. 일정을 끝내고 간다면 되는 걸까, 다른 일정으로 조금 더 미뤄진다면 많이 늦어진다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초대에 늦게 대답하는 것 역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와 너의 약속이야?”
“... 그래요.”
그는 나를 보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내가 대답하자 그는 만족한 듯 허리를 펴며 일어났다.
“일정이 끝나면 방문 전에 미리 연락드릴게요.”

“... 응. 꼭 그렇게 해줘.”
그리고 나는 짧게 고개 숙인 뒤 인사하고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났지만, 그는 내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듯했다.

그 사람에게 방문 의사를 밝히는 연락은 의외로 금방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일정이 빠르게 끝났기에 나는 간단한 편지로 그에게 나의 방문일정을 알렸다.
사실 그에게 방문일정을 알리면서 나도 모르게 그와 만남을 조금 기다렸다. 여태까지 만났던 왕자 중에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히노토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미의 일족의 성에 다다르자, 그는 나를 향해 달려왔다. 왕자가 저래도 괜찮은 건가...? 체통이고 뭐고 다 잊은 듯 나를 보고 웃으며 달려오는 그를 보니 그 역시 나를 꽤나 기다렸으며 나와 만나기를 내심 기대한 듯 보였다.
“기다렸어, 공주. 일부러 와줘서 고마워.”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와의 만남을 기대했던 마음을 조금 숨긴 채, 그의 뒤로 보이는 미의 일족 사람들을 조금 의식해서 일국의 왕자와 공주로서 의례적인 인사로 답했다. 내가 그의 인사에 답하자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참 웃음이 많은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 허리께로 손을 뻗으려 하였으나 그 움직임을 멈추고 그 대신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제안하듯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우선 성을 안내할까?”
왕자님이 공주님을 에스코트하듯 내민 손을 바라보며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여태 많은 왕자에게 에스코트를 받아봤지만, 이곳은 왜인지 나를 조금 더 편안하게 해주었고, 그런 그가 편안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부탁드릴게요.”
그는 나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성의 안뜰로 데려다주었다. 히노토에게 안내받아 향한 성의 정원에는 동백꽃이 만발해있었다. 예쁘게 피어있는 동백꽃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자, 그는 정원의 가장자리에서 초목을 손질하고 있는 여자분을 향해 감사의 말을 건네었다. 그가 미소 짓자 정원사는 볼을 붉히며 그 자리를 허둥지둥 떴다. 정원사를 보면서 새삼 느꼈지만, 미의 일족의 성의 사용인은 전원 여성이었다.

마침 내가 그의 성을 방문한 시기는 기원 의식을 앞둔 시기였다. 구요에는 매년 12 왕족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신악전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게 되며, 일족이 바뀔 때 행해지는 의식인 기원 의식에서는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해에는 히노토가 있는 미의 일족이 아닌 신의 일족이 의식의 공연을 도맡은 해라고 히노토가 설명해주었다.
“여기는 어디예요?”
“기념 의식이 행해질 신악전이야. 내 차례는 작년이었으니까 그때 보여줬으면 좋았겠지만.... 이번에는 카노에가 하는데.... 뭐 알아서 잘 하지 않을까.”
“카노에가 누군데요?”
올해에는 신의 일족이 의식의 공연을 도맡았다며 설명해주었으니 잘 생각해보면 카노에가 신의 일족의 사람임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그 사람이 누군지 물어봤다. 이유는 나도 몰랐다. 다만 내가 물어보았을 때, 그 사람은 말을 돌렸다. 그리고 때마침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자, 시작한다.”

공연이 시작한다는 말에 시선을 무대로 향하자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피리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무대의 중앙에서 건장한 남성들이 마치 하나를 이루어내는 듯 춤을 추었다. 그 중앙에는 유난히 나의 시선을 끄는 한 사람이 있었다. 다부진 몸에 화려한 화장을 한 이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모두를 하나의 구심점으로 이끌어 공연하고 있었다. 공연을 보면서 점점 나도 모르게 동작 하나하나에 눈이 빼앗겼다. 이 당시에는 나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궁금증 및 흥미로 지금 연무대에서 춤을 추는 이에게 관심이 생겼다고만 생각했었다.

공연이 끝나고도 그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 나는 멍하니 무대를 보고 있었다. 실로 눈길을 끄는 공연이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혼자서 보러온 공연이었다면 조금 더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며 조금 더 감상을 즐겼겠지만, 함께 온 그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기에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무척 멋졌어요.”
“너를 위해서 특별히 좋은 자리를 준비했어.”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면서, 다시 무대를 바라보곤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짧은 대화가 끝날 즈음, 그 사람의 비서가 다가와 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히노토 왕자님, 이 뒤에 전임자로서 인사를...”
아직 행사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에,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행사를 진행해 달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짧게 한숨을 뱉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연장을 향해 걸어갔다.
“―미의 일족의 왕자, 히노토다.”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전하는 그를 나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다만 계속 머릿속에는 연무 공연이 남아 맴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히노토의 인사가 머릿속에 들어오진 않았다. 다만 가능하다면 방금 공연했던, 카노에 라고 했던 이의 공연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같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바랬기 때문일까, 카노에를 다시 한번 보게 될 기회는 꽤나 가까이 있었다. 기념 의식이 끝난 이후 신의 영지로 돌아가던 왕자와 그 일행이 드림이터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미의 일족 역시 이미 히노토가 한번 드림이터에게 당해 반지에 잠들어있었기에 나에게 왕자를 구해달라는 연락이 미의 일족에게 도달했다. 꽤나 급하게 받은 소식이었기에, 나 역시 조금 서둘러서 신의 일족의 영지로 향하기로 했다. 당초 예상했던 일정보다 조금 더 앞당겨 미의 일족의 영지를 떠나게 되었고, 히노토는 그런 나를 배웅하러 나왔다.
“며칠간 잘 쉬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또 뵙길 바라요.”
어찌 보면 조금은 형식적인 인사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또 만나고 싶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히노토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나도 즐거웠어, 공주.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히노토와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서둘러 신의 일족 영지 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의 일족 영지로 향하면서 나도 모르게 걱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서는 예정보다 빠르게 떠나게 된 히노토에 대한 생각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신의 일족의 왕자가 드림이터에게 당했다는 곳의 멀지 않은 곳에서 나는 금방 그 사람의 반지를 찾을 수 있었다. 반지에 기도를 담아 그를 깨우자, 나는 공연에서 보았던 사람을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신의 일족의 왕자였구나, 반지에서 깨워진 그는 내가 곁에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듯,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여긴...?”
그런 그가 놀라지 않게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정신이 좀 드세요?”
그는 대답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듯 일어나며 나를 마주 보았다. 아직 반지에서 깨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이 없는 듯 그는 한참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를 연무 무대에서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의 첫인상은 날카로워서 조금은 사나워 보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는 사나움이나 날카로움 혹은 경계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 아?”
“드림이터에게 당해서 잠들어 있었어요. 제가 지금 당신을 깨운 참이고요.”
나의 대답을 듣고 그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혹여 자신이 잠든 사이에 영지에 피해가 간 것은 아닐까, 얼마나 오래 잠들어있던 것일까 같은 걱정을 하는듯한 얼굴에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신의 일족 영지는 괜찮아요. 오면서 직접 봤어요. 드림이터에게 당한 사람들이 조금 있긴 했는데, 지금은 전부 무사하고요.”
그를 찾아오면서 잠시 들렀던 신의 일족 영지에서 드림이터에게 당한 사람들을 만나고 왔었다. 드림이터에게 당해 끝없는 잠에 들었던 사람들을 깨워주고, 신의 일족 성의 사람들에게 왕자의 여로를 물어봐 그를 찾아내었으니 말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짓고는 나에게 물어보았다.

“... 트로이메아의 공주인가?”
다만, 그는 나에게 질문을 한 뒤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이 생각 외로 귀여웠던 탓에 나는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만 이 감상은 나 혼자만 알고 있기로 했다. 보통 귀엽다고 말하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얼굴에 살짝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제대로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 시츠키라고 해요.”

“... 시츠키.”
그는 내 이름을 한번 불렀다. 그 울림이 여태까지 만나왔던 다른 왕자들이 불러줬던 이름과는 다른 파동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왜 이 사람이 부르는 내 이름이 이다지도 설레게 들리는지 이때는 그저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설레게 들리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고맙다, 트로이메아의 공주.”
“아뇨, 제가 해야 했던 일인걸요.”
“그래도 내 쪽에서 감사해야 할 일이 맞아. 그러니 정식으로 영지에 초대하고 싶다.”
나를 영지로 초대하는 그의 권유에 나는 가볍게 웃었다. 조금 더 이 사람을 알고 싶다, 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었는데 마침 그가 나를 초대해주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던 그는 내가 미소 짓자 나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그러니까, 환대를 준비하겠다! 트로이메아의 공주, 당신은, 시간이 괜찮다면, 우리 영지로....”

조금씩 커지는 목소리에 갈 곳을 잃은 시선 처리, 적잖이 당황한 듯한 반응이 조금 더 이 사람에 대한 흥미를 일으켰다.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요.”
나의 대답과 함께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헝클어놓았다. 나는 머리카락을 다시 정리한 뒤 말을 이었다.
“마침 지내던 곳에서 떠나온 참이었어요.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평소라면 나의 일정을 생각했겠지만, 미의 일족을 방문하는 일정 도중에 그를 만나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 더 그와 함께 있으면서 이 사람을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 어, 어어.”
조금 당황한 듯 얼버무린 듯한 대답을 하는 그에게 나는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일어났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이 참으로 크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의 손은 따뜻했다.

우리는 영지로 향하며 말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평소에 말주변이 없는 편이기도 했고, 그 역시 나에게 따로 말을 걸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다시 말하면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것은 보였으나 그는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조심스레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여기 오기 전엔 어디 머무르고 있었나?”
“미의 일족 영지요.”
내 대답을 들은 그는 다시금 정면으로 시선을 향했다가 나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 그런가. 혹시 히노토... 미의 일족 왕자를 만났나?”
“네. 깨워 드린 보답으로 초대를 받아서, 얼마 전까지 미의 일족 영지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그에게 대답하자 공연을 보기 직전에 히노토가 카노에라는 이름을 말했던 것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둘이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 듯 히노토는 카노에의 이름을 꺼냈고 지금 눈앞에 있는 카노에 역시 내가 미의 일족의 영지에 있었다고 하니 히노토를 언급했다.
“히노토 왕자랑은 잘 아는 사이신가 봐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영지이기에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걸까, 언뜻 봐서는 두 사람의 나이대 역시 비슷해 보이기도 하여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첫인상만으로는 쉬이 두 사람의 관계가 친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다. 영지가 가깝기도 하고.”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내 첫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 그래요?”
조금은 놀란 나머지, 나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첫 만남부터 나에게 친근하게 대했던 히노토와, 나를 어찌 대해야 할지 조금 망설이기도 하는 카노에는 서로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를 계속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가만히 멈춰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그 사람이 돌아보았다.
“... 의외라고 생각해?”
정곡을 찌르는 듯 그는 나에게 의외냐고 물어보았다. 의외라고 말한다면 조금 예의에 어긋나려나 라는 생각을 했지만, 놀랍지도 않다는 듯 툭 말하는 그의 말투를 듣고는 자주 그런 이야기를 듣나보다 라고 판단 지었다.
“음.... 네. 서로 너무 달라서요.”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서로 너무 다르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되었는데. 나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나의 대답을 듣고는 그 사람이 피식 웃었다. 여태 꽤나 무섭게 굳어있던 표정이 한순간 풀어졌다. 저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깐 웃고는 나에게 다시 물어왔다.
“... 미의 일족 영지에서는 어떻게 지냈지?”
나의 첨언에 그는 딱히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가 나에게 히노토의 영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았다. 그다지 특별한 것은 없었기에 바로 대답하였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히노토 왕자와 영지를 구경하고... 아.”
말하다 말고 문득 기념 의식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당신의 공연을 봤다고 얘기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져서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같이 기념 의식을 봤어요. 거기서 카노에 왕자의... 당신의 공연을 봤고요.”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제법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 뭐?”
“그 공연이 무척 기억에 남아서 카노에 왕자를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카노에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진심이었다. 다만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빨리 그를 만날 기회가 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비록 첫 만남이 그에게 닥친 사고로 인해서 만나게 되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드림이터로 인해 아직도 많은 왕자가 잠들어있거나, 반지 속에서 잠들고 있었으니까. 그들을 다시금 깨우는 것이 나의 일이었기에 나는 내 할 일을 하다가 조금 빠르게 그를 만난 것이었다. 나의 말을 들은 그는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리는 그의 귀가 조금 빨개진 것이 보였다.
“... 기억에 남았어?”
그의 물음에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당신의 공연은 내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기억에 남아 당신을 다시 한번 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고. 이 말을 그대로 전달하기에는 나 역시 조금은 쑥스러웠기에 짧은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네. 무척 멋있었어요.”
그 대답 이후로 우리는 다시 조용히 그저 영지를 향해 걷기만 하였다. 그렇게 조금 걸었을까, 그 사람은 나를 향해서 입을 열었다.
“... 연회가 예정되어 있다.”
처음 대화를 나눌 때부터 느꼈지만, 카노에는 히노토보다 말솜씨가 좋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점으로 보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조금은 당황한 듯한 표정이 보였기에 든 생각이었다. 당황한 것이 맞는 듯 그는 살짝 입술을 깨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의식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것을 기념할 겸 신년을 축하하는 자리야. ...괜찮다면 트로이메아의 공주, 너도 그 자리에 와주었으면 해.”
영지 초대에 이어서 연회에 초대받았다. 그의 말은 마치 나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만 열리는 것이 아니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부담 가지지 말라는 작은 배려가 느껴져 나는 웃으며 승낙의 말을 건넸다.
“네. 꼭 참석할게요.”
이전에 다른 왕자들과 만났을 때 와는 달리 이 이후로 그와 함께할 시간을 조금씩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조금 놀라며 지금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이 사람에게 조금 더 흥미가 생기고 있었다.


기념 의식의 성공을 기념하며 신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나는 다시 한번 히노토와 만날 수 있었다. 히노토와 재회했을 때 히노토의 곁에는 유의 일족의 왕자인 카노토가 함께 있었다.

“... 트로이메아의 공주, 정말 미안하다.”
카노에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나에게 사과를 했다. 나를 처음 만난 카노토 왕자가 마치 신기한 것을 본 듯 나의 몸을 더듬거리며 만졌기 때문이다. 꽤 놀란 나머지 나 역시 얼어붙어서는 아무 말 못 하고 있었는데, 그런 카노토를 제지한 것은 히노토였다.
“음...? 만지는 거, 안 돼?”
“안 돼. 트로이메아의 공주는 여자아이잖아. 만질 거면 이렇게 무섭지 않게 하는 거야. 알겠지?”
히노토는 상냥한 말투로 카노토를 나무라고선 자연스럽게 내 머리칼을 살짝 쥐었다. 히노토의 행동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카노토 왕자는 마치 새로운 것을 본 듯 말을 이었다.
“여자아이...? 그렇구나. 너는 여자아이구나... 여자애. 처음 봤어.”

여자를 처음 봤다는 카노토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당황했다. 카노토의 말에 당황한 나에게 카노에가 카노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면서 말하였다.
“미안하다. 그... 카노토에겐 사정이 있어서, 세상 물정을 잘 몰라.”
“네....”

자신이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사과하는 카노에의 모습에 나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있지. 한 번만 더 만지면 안 돼?”
“안 돼.”
나의 대답이 나가기도 전에 카노에가 카노토를 제지하였다.
“하지만 히노토 형은 만졌잖아...”

“... 카노토 그럼 못써. 그런 건 따라 하는 게 아니야.”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는 것처럼 말하는 카노토에게 카노에는 어린 동생에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듯 말하였다. 동시에 카노에는 나의 머리칼을 만진 히노토의 행동 역시 나무랐다. 그런 카노에의 말이 기분 나빴는지 히노토가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 말이 심하네.”
카노에의 말에 살짝 기분이 상했는지 히노토는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카노에에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카노에는 그런 히노토의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히노토를 꾸짖었다.
“너는 좀 입 다물어. 그리고 카노토는 트로이메아의 공주에게 제대로 사과해.”
“응 알았어.”
“예이. 예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니 딱히 서로가 서로에게 가시를 세운 대화가 아니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 친하기에 저렇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이라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에 두 사람이 친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막상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했어요...”
“괜찮아요. 조금 놀랐지만 화나진 않았어요.”
“그래... 너. 착해. 고마워.”
조금 전 카노에가 나에게 사과한 것을 따라 하듯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카노토 왕자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후로도 세 사람의 대화에 자연스레 끼여 나는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밤이 무르익고 축하 연회의 술자리에서 나는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신년을 축하하던 카노에가 잠시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옆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 나는 카노에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나오자, 금방 그를 찾을 수 있었다.
“카노에!”
약간 술기운이 들어간 탓일까, 지금까지 카노에 왕자라고 불러왔던 그를 어느샌가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버렸다. 하지만 그런 나의 부름에 놀라지 않고 그는 살짝 미소 짓고 나를 바라보았다.
“시츠키... 너구나. 재미있어?”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 발걸음은 많이 취한 듯 비틀거리는 발걸음이었다. 그가 조금 더 가까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의 얼굴이 새빨갛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 걸까, 카노에의 상태가 조금 걱정이 들었다.
“괜찮아요? 앉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앗.”
그의 곁에 다가가 그의 몸을 살짝 받쳤다. 다만 균형을 잃은 그의 몸이 크게 흔들리고 나는 그와 함께 주저앉고 말았다.

“...으...”
“괜찮아요? 지금 물 가져올게요.”
술기운에 머리라도 아픈 듯 주저앉아 앓는 소리를 내는 카노에가 걱정되었다. 그런 카노에가 걱정되어 물을 가져오려고 일어나려는데 카노에가 나의 손을 잡곤 말했다.

“... 앉는 것보다 눕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한 카노에는 옆에 나를 앉힌 뒤, 나를 향해 스르륵 그의 몸을 미끄러뜨려 내 무릎에 자연스레 무릎베게를 하고 누웠다.
“카노에...?”

너무 놀란 나머지 그를 불렀는데 그런 나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편안하게 누워서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편해.”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놀라 그의 얼굴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후우... 편하다...”
취해서 그런 걸까,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과는 또 다른 카노에의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그에게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몽실몽실해졌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늠름했던 그의 모습이 아닌,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귀여워 그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하아....”

술기운이 올라오기라도 하는 듯 그는 한숨을 길게 쉬더니 내 손을 꽉 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 때문일까, 마음 한구석부터 따스함이 전신을 향해 퍼져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이 느낌으로 인해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이 사람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었구나. 그가 하는 몸짓 하나에 그대로 반해서, 그에게 다가가고 싶어졌었던 것이었구나. 또한 그의 스스럼 없는 행동에 그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지금 그가 내게 하는 이 행동이 다른 이가 나에게 했었다면 당황했을 법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손을 잡은 카노에의 손을 맞잡은 채 나와 카노에는 이것저것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노에가 내 손을 잡은 힘에 맞추어 나 역시 카노에의 손을 꼭 마주 잡은 채로.
“... 그러니까, 앞으로도 곁에 있어.”

“...카노에.”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곁에 있으라는 말을 하는 카노에의 호박색 눈동자에서는 애절함이 느껴졌다. 그런 카노에에게 나는 미소 지으며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답은?”
그렇지만 그런 내 대답이 조금은 부족한 듯, 카노에는 어린아이처럼 내게 대답을 바랐다. 그런 카노에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나의 반응을 본 카노에는 만족스러운 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날카로운 인상에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웃는 얼굴이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 웃는 얼굴을 항상 곁에서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네 목소리로 말해 줘.”
“네... 계속 카노에의 곁에 있어도 될까요?”
직접 말해달라는 그의 요청에, 이번에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곁에 있어도 되냐는 허락을 구했다. 그런 나의 요청에 그는 기쁜 듯 답해주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승낙한 뒤 그는 잠깐 잠이 들었다. 깜빡 잠이 든 카노에의, 아니 이제는 연인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행복을 곱씹다 인기척이 느껴져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인기척이 느껴지던 곳에서 사라지는 옷자락을 보았다. 그 옷자락은 내가 아는 옷자락이었다.
어째서 나와 카노에가 있는 곳에 그가 오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밤이 깊고, 제법 쌀쌀한 찬 바람이 불어오자 카노에가 살며시 눈을 떴다.
“아... 카노에.”
“시츠키...?”
눈을 뜬 카노에의 이름을 부르자, 카노에는 갑자기 정신이라도 든 것처럼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뜨고 내 이름을 부른 뒤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내가 왜 네....”

아직 술이 덜 깬 건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카노에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어지지 못한 그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카노에가 취한 것 같아서요. 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기억 못 하세요?”
“이야기...?”
내가 한 말의 끝을 따라 하며 그는 정신을 차려보려는 듯 표정이 험악해졌다. 카노에의 표정은 조금씩 기억이 나는 듯 점점 찡그려졌다. 이내 모두 기억이라도 해낸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작게 열린 입에서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 생각났어. 내가 맘대로 네 무릎에 머리를 얹고.... 미안, 폐를 끼쳤다.”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는 듯,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려버렸다. 고개를 든 카노에가 보고 싶은데, 라는 생각이 들어, 내 생각을 그대로 그에게 전했다.
“괜찮아요. 저는 싫지 않았고… 오히려 평소와는 다른 카노에를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좋았다고?”
나의 말에 놀랐는지 그는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내 생각을 그대로 전하자고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카노에가 어쩐지 어린아이 같아서 무척이나 귀여웠어요.”
“으악!”
마음을 전하려는 생각이 앞섰던 건지, 돌려 말하지 못하고 카노에처럼 그대로 말해버렸다. 카노에가 귀여웠다는 내 말에 적잖이 당황하였는지 그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다고 느껴지고 있었다.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해서 애써 의연하게 있었다.
“…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야. 남들은 항상 나를 무서워하기만 했으니까. 오늘도 친목을 다지고 싶다고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서...”
그의 대답에서 조금 의외의 말을 들었다. 이 연회의 주최자이기에 단순히 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게 취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술이 약하다고 카노에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꽤나 예상 못했던 말이었기에 내 입에서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그에게 되묻는 말이 튀어 나갔다.
“네? 원래 술 못 마셔요?”
“어. 원래는 술을 못 해.”
진짜 잘 마실 것처럼 생겼는데, 라는 말을 안간힘을 다해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속으로 삼키느라 애를 썼다. 그 대신 술을 못한다는 말을 들으니 피어오른 걱정을 표현했다.
“그랬구나... 괜찮아요?”
나의 물음에 그는 아까 보여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대답해주었다.
“괜찮아. 아직 조금 취기가 남아있긴 하지만 의식도 분명하고... 아까 너랑 이야기한 것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앞으로도 곁에 있으라고 한 것... 술김에 나오는 대로 한 말 아니야.”
술이 약하다는 말에 어림짐작으로 그가 했던 말이 진심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고 조금은 슬펐었다. 하지만 카노에는 그런 나에게 그가 했던 말이 진심이었다고 전해주었다.
“거짓 없는... 내 진심이야.”

“...카노에...”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카노에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내게 말했다.
“게다가, 나는 말로 하는 것이 서툴러서 변명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좋아하는 여자가 아니고서야 무릎 베게 같은 그런 건 안 해.”
그는 변명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고 했지만, 변명이었어도 괜찮았었다. 오히려 그가 직접 무릎 베게 같은 일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한다고 말하며, 그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표현해주었다. 그 한마디에 내 심장 소리는 조금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카노에한테도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크게 뛰었다. 그런 마음을 살짝 진정시키고 그에게 대답하였다.
“네, 괜찮아요. 변명으로 들리지 않고, 카노에의 마음은 확실히 전해졌어요.”
“자꾸 묻는 거 아닌가 싶은데, 화 안 난 거 맞지?”
내 표정이 생각과 달리 조금 굳어있었는지 카노에는 내가 화가 나지 않았는지 물어보며 나에게 다시 사과하려 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 나는 내 진심을 전하기 위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이에요. 왜냐하면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당연히 좋으니까요.”
나에게 진심을 전해준 그에게 대답하기 위해, 나 역시 진심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그런 나의 대답에 카노에는 조금 놀란 듯 싶었다.
“어? 그 말은...”
나의 대답에 부끄러운 듯 카노에는 내 눈을 피해버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카노에는 입을 열었다.
“… 다시 말할게.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 나도 평생 너의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너를 절대로 놓지 않을게.”
단호하고 간결한 말로 내게 진심을 전한 카노에가 나를 끌어안았고, 나 역시 그 대답으로 카노에의 등에 팔을 둘렀다. 내게 전해지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이 행복을 그대로 맘껏 만끽하고 싶었다.

'백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켓 디자인  (0) 2023.10.27
드림주 프로필(시츠키)  (0) 2022.05.31
드림 정리용 백업(카노에 프로필)  (0) 2022.04.21
[카노시츠] 2022.02.22 타로 백업  (0) 2022.02.25

+ Recent posts